꼬박 백 번을 채웠다. 헤어지자고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백 통의 전화를 거는 일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전화를 걸 생각은 아니었다. 한두 통 하다 보니 자동적으로 내 손가락은 그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오기도 생겨났다. ‘니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라는 생각과 ‘제발 한번만 받아줘’라는 애원이 교차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공중전화라니 이해 못할 법도 하다. 하지만 정액제를 사용하던 나의 휴대전화는 이미 수십 통의 전화로 발신이 더 이상 안 되었고 마지막 보루가 공중전화였다.
찾기도 힘들었다. 10여분 돌아다닌 끝에 동네 어귀에서 낡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한걸음에 달려가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성급하게 넣었다. 전화요금이 얼마인지는 당연히 몰랐다. 목이 메어와 침을 한번 꿀컥 삼키고 그의 번호를 눌렀다. 내 귀에 들리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음성메시지를 남겨주세요”라는 기계음이었다. 추위는 견딜 수 있었지만 마음의 갈증은 점점 심해졌다. 다시 한번 절박한 심정으로 번호를 눌렀다. 차디찬 부스에 선 채 번호를 누르다 보니 손가락마저 굳어져 갔다. 급하게 외투만 걸치고 나온 내게 겨울바람은 혹독했고 매서웠다. 손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졌다. 얼마인지 모를 만큼의 동전을 저금통에서 털어 가지고 온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사는 곳과 그가 사는 곳은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 시계는 밤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게 옳은 일인지 판단할 틈도 없었다. 어느덧 나는 인천행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늦은 오후의 광역버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한 끼도 먹지 않아 기운은 없었지만 배고픔보다 그를 보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허기를 달래주었다.
그의 방에서 희미한 불이 새어나왔다. 조금 열어둔 창으로 고양이가 빼꼼 쳐다보며 야옹야옹 울었다. 내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다. 고양이의 울음에 나의 존재를 예감한 듯 커튼 뒤에 비치던 그의 실루엣은 이내 사라졌다.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지만 담담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현관문 앞으로 가서 핸드폰 액정을 옷에 닦아 얼굴을 한번 비춰보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라는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입에선 대화 좀 하자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너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돌아가라는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헤어짐을 통보받은 연인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손으로 문을 치며 울었다. 무작정 서럽게 울어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가 없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 나를 둘러싼 매서운 강풍과 폭설도 그의 사랑이라면 충분했다. 울며불며 문을 두드리면서도 ‘설마 이렇게까지 하는데 몇 시간 뒤엔 열어주겠지’란 생각도 했다. 감기에 걸리면 엄마처럼 걱정해주던 그가 아니었던가. 오산이었다. 그는 인기척도 없었다.
혈액형을 믿진 않지만 A형 남자들의 치밀하고 계산적인 냉정함이 퍼뜩 떠올랐다. 그는 모든 게 칼 같았다. 헤어짐을 통보하자마자 몇 시간도 안 돼 내가 사는 곳으로 몇 개의 상자를 차에 싣고 오더니 자신의 집에 있던 물건들이라며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너를 감당하기엔 자신은 한없이 부족한 것 같다며 떠나버렸다. 그의 표정에는 몇 번의 계절을 함께했던 우리가 없었다.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상자들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니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제야 견딜 수 없는 이별의 후폭풍이 밀려왔다. 이렇게는 끝낼 수 없다고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되냐고 따지고 싶었다. 몇 년 동안의 관계가 한순간에 매몰차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우리 사이에 분명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가 사소한 오해라면 우리는 그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차가운 철문을 사이에 두고 고양이는 매정하게도 울어댔고 나는, 굳게 닫힌 현관문 앞에서 쌓여가는 눈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듯 또 한번 서럽게 울었다. 쌓여가는 눈에 내 울음이 묻힐까봐 엉엉 소리내 울었다. 울다 보니 우습게도 허기가 몰려왔다.
그의 집 앞 편의점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불 꺼진 방을 바라보았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원망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물 섞인 컵라면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새벽 세 시를 넘길 무렵 그의 방에 불이 켜졌다. 편의점 온기에 나른해질 무렵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그의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내가 잘못했어. 그럴 심산은 아니었어.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듣고 있니? 제발 한번만 문을 열어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니가 아니라 우리가 아닌 거야. 내 말 알겠니?” 그는 이 말을 내뱉고 일별하고는 방 안의 온기가 채 전해지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렸다. 닫힌 문 앞에서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입술을 깨물자 차가운 피가 혀에 감돌았다. 어느덧 수북하게 눈이 쌓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희미한 가로등 빛 속을 걸었다. 한 발자국씩 발을 뗄 때마다 ‘우리가 아닌 거야’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절망과 원망의 발자국을 남긴 채 나는 첫차를 탔다.
몇 달을 앓고 난 후 내게 남은 건 망가져버린 위장뿐이었다. 이십대의 마지막 사랑은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날의 기억을 남겼고 나는 지금도 자취방 구석에 앉아 가슴속 멍울을 품은 채 소주잔을 채운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지 않았던가. 주억거리며 읽어 내려가던 사랑에 관한 이론들, 이별 후에 오는 소소한 미련과 집착들. 그 속에서 내가 깨달은 건 그를 향한 숭고한 열정이었다. 조금 더 집착했더라면, 조금 더 매달렸더라면 우리 관계는 희미하게나마 이어질 수 있었을까. 이제는 사랑이 아니라 덧없는 그리움일 뿐인데도, 나는 지나가버린 사랑에 대해 피식 웃는다.
펌 :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8&aid=0002192857&date=20130621&type=1&rankingSeq=8&rankingSection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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